20일 0시 0분, 현지 시각으로는 19일 오후 3시, 12-13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EPL)의 최종전 10경기가 일제히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중에서 생중계된 경기는 Anfield에서 펼쳐진 리버풀과 QPR과의 경기였습니다. 이미 각각 7위와 강등이 확정되어 유로파리그 진출이나 잔류와 같은 인센티브도 없는 경기. 물론 이 경기가 생중계된 이유는 단 한 가지, 박지성 선수의 선발 출장 때문이었습니다.  세자르, 레미 등과 더불어 이번 시즌이 끝나고 이적할 것으로 예상되는 박지성 선수입니다. 물론 그 팀은 EPL의 어느 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오늘 경기는 박지성 선수의 마지막 EPL 경기가 될지도 모르죠. 차범근 이후 한국이 낳은 가장 세계적인 스타이자, 국가대표팀의 영웅, 많은 선수들의 우상인 박지성 선수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경기, 그러나 저에게 이 경기는 또 한 명의 우상을 떠나보내는 경기였습니다.

 

QPR Training Session - QPR
다음 시즌에도 영국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지성 선수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11명의 캐러거로 이루어진 팀을 꿈꾼다네!

 지금은 광적인 야구팬이지만,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저는 해외축구에 미쳐 있었습니다. 다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자 맨유팬이랍시고 EPL을 본다며 깔보던 저는 리버풀의 팬이었습니다. 아주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박지성이 영국으로 향하기 직전에 펼쳐진 04-05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스탄불의 기적이라는 명칭이 더욱 익숙한) 경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의 저에게 더욱 멋지게 보였던 선수는 그라운드를 누비는 제라드, 알론소, 스미체르였습니다. 그렇게 리버풀 팬이 된 저는 친구들과 이룬 축구팀에서도 리버풀 유니폼을 제안했고, 중앙수비수였고 체격 조건도 비슷했던 저는 자연스럽게 등번호 23번와 그의 이름을 유니폼에 새겼습니다.

"우리는 캐러거들로 이루어진 팀을 꿈꾼다네!"


 제임스 리 던컨 캐러거. 제이미 캐러거라는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이 헌신적인 수비수는 1978년 리버풀에서 태어났습니다. 1990년 유스팀에 입단한 이래 오직 리버풀을 위해서만 뛰었던 그가 어린 시절 지역 라이벌로 '머지사이드 더비'의 또 다른 주인공인 에버턴의 팬이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리버풀에 입단한 후, 그가 단 한 순간도 팀을 위해 헌신적이지 않은 순간은 없었습니다. 캐러거의 응원가에는 "우리는 캐러거들로 이루어진 팀을 꿈꾼다네(We all dream of a team of Carraghers.)"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가장 열정적인 그들의 부주장을 향한 콥(리버풀 서포터즈)의 애정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새벽의 은퇴 경기까지 총 737경기를 치르며 그가 만든 에피소드도 매우 많습니다.



리버풀보다 더 큰 클럽이 뭔데?

 이미 2001년 트레블의 위업을 이루었고, 그 후 침체기를 맞고 있는 팀에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던 젊고 강인한 수비수였던 그에게 당연히 이적설이 있었습니다. 특히 04-05 챔피언스리그에서 활약하며 더욱 주목을 받자 한 기자가 리버풀보다 '더 큰' 클럽으로 이적해 더 많은 메달을 딸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캐러거는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리버풀보다 더 큰 클럽이 뭔데?" 어쩌면 '더 큰'이라는 수식어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캐러거에게 클럽이란 리버풀 뿐이니까요.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결국 우승을 차지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이스탄불의 기적'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물론 제라드, 알론소, 스미체르처럼 위협적인 찬스를 만들어 내고 골을 넣은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 날의 경기를 돌려보면 한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습니다. 이미 3장의 교체카드는 소진한 상태에서 쥐가 난 다리.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도 되어 있었다는 듯이, 절뚝거리며 공을 향해 달려듭니다. 그리고 이미 기적이라고 불려도 좋은 연장승부 끝에 찾아온 승부차기에서 그는 골키퍼인 두덱에게 '브루스처럼 해봐'라고 말합니다. 1984년 결승전에서 AS 로마 선수들을 당황시킨 리버풀의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의 춤추는 듯한 다리 움직임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세브첸코의 킥을 두덱이 막아내며 '춤덱'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해피 엔딩이었습니다.



삼사자보다도 라이버버드

 리버풀은 매우 독특한 동네입니다. 그들은 스카우즈라고 불리는 강한 사투리를 사용하며 English(영국인)보단 Scouser(리버풀 사람)으로 불리길 원합니다.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온 캐러거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경기 중 큰 실수를 범한다면 리버풀 유니폼을 입은 순간보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순간이길 바란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는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삼사자기보다 라이버버드(Liverbird, 리버풀을 상징하는 상상의 새)가 새겨진 리버풀 문장이 더욱 소중하니까요.

 그의 이런 열정은 단순히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2011년 4월 17일에 펼쳐진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그는 상대 선수와 충돌 과정에서 정수리를 강타당해 경기장에서 기절해버렸습니다. 10분이 지나서야 깨어난 그는 다시 경기장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팀 닥터의 끈질긴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결국 노심초사하며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그는 종료 휘슬이 울리며 팀의 1점 차 짜릿한 승리가 확정되자마자 팀 동료들을 축하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라운드에 쓰러져도,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팀의 승리를 위한 열정만이 가득합니다.

 

 물론 그의 이런 열정이 약간 과해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팀 동료인 아르벨로아가 마크맨을 완전히 놓치며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자 불 같이 화가 난 캐러거는 알론소가 말리기 전까지 그라운드 위에서 아르벨로아와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고 유서 깊은 더비 경기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레즈 더비'에서 그는 더욱 과격해집니다. 나니를 걷어차고 퇴장당해 부상을 입힐 우려가 너무 컸다며 비난을 받는 동시에 팀의 패배를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헌신이라는 단어도 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사실 캐러거는 체격 조건이나 신체 능력이 매우 뛰어난 선수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는 리버풀 역사상 가장 많은 자책골(5골)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이기도 합니다. 그가 737경기에서 상대팀의 골문으로 넣은 득점 수와 정확하게 일치하죠. (오늘 경기에서 61분에 때린 오른발 중거리슛이 골대를 맞지 않고 골문 안으로 향했다면 오래간만에 골을 기록할 수도 있었겠지만)그리고 심지어 그 자책골 중 2개는 1999년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레즈 더비' 한 경기 동안 기록한 것입니다.

 올해 2월 22일 안필드에서 제니트를 상대로 했던 유로파리그 32강 토너먼트 2차전, 이미 1차전에서 2:0으로 패했던 갈 길 바쁜 리버풀은 캐러거의 치명적인 실수로 헐크에게 오히려 선제골을 헌납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리버풀은 세 골이나 넣으며 희망을 이어갔지만 결국 캐러거의 실수로 잃은 그 한 골이 원정골 우선원칙에 따라 리버풀의 패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경기를 보며 이제는 우리의 영원한 부주장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었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은퇴경기를 1경기 앞둔 지난주, 팬들의 플래카드에 감동해 직접 구단버스 밖으로 나와 함께 포즈를 취한 캐라


 그럼에도 콥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헌신이라는 단어도 그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레전드라는 단어는 너무 많이 쓰여 그와 같이 진정으로 특별한 선수를 기억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떤 선수가 감히 그만으로 이루어진 팀을 꿈꾼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경기는 전반에 쿠티뉴의 멋진 중거리슛으로 획득한 리드를 잘 지킨 리버풀이 1:0으로 승리했습니다. 선수들이 캐러거에게 많은 공격 찬스를 몰아주는 것이 확연히 보였습니다. 골대를 맞춘 중거리슛이 아쉽긴 했지만 팬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골을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첼시의 존 테리, 맨유의 리오 퍼디난드처럼 대단한 피지컬이나 종종 득점을 기록할 수 있는 공격본능이 없어도, 그는 가장 충직하고 열정적인 리버풀 선수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는 이제 안필드를 떠나 해설가로서 제 2의 축구 인생을 시작합니다. (사투리가 매우 심한 그가 잘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콥은 굳게 믿습니다. 그램 수니스가 그랬듯, '킹 케니'가 그랬듯, 언젠가 우리의 캐라가 안필드로 돌아올 것이라고요.

 제이미,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The Kop will miss you a lot! Thank you, Carra.

Posted by 마산야수

 저는 언제나처럼 야구 영상들과 스탯들을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묘했습니다. 새로운 한 달의 시작이기에 앞서, 저에게는 참 다양한 기억이 공존하는 노동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아끼는 동생과 통화를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근로자의 날, 노동절을 다르게 표현하는 말로 한국 사회에서는 훨씬 보편적인 단어입니다. 동생이 오늘 근로자의 날이라고 그러더군요. 그러나 절대 근로자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지칭하는 인간들의 삶을 대변해주지 않는 단어입니다. 勤勞. '부지런한 근'에 '일할 노'입니다. 저는 평소처럼 근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는 아니라고, 차라리 노동이 훨씬 중립적인 단어라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동생이 그러더군요. 노동은 왜인지 무섭고, 험한 단어 같다고, 노동자는 육체노동자들만이 떠오른다고.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또 기분이 묘하더군요. 무서운 단어라... 勞動. '일할 노'에 '움직일 동'. 말 그대로 일한다는 뜻인데,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상당히 지배자, 혹은 관리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단어보다 훨씬 중립적인 단어이지 않냐고 말했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나 봅니다. 그 동생도 성인이고 절대 훈계하려는 섣부른 시도는 아니었기에 간단히 제 생각을 말해주는 것에 그쳤지만, 저는 또 다시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근로'라는 단어는 언어의 정치적 효과를 충분히, 아니 초과 달성한 것은 아닌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근로자가, 그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어떠한 행동을 취한다면 그것은 그 본분을 망각한 것입니까? '근로자의 날'은 단순히 열심히 일한 이들이 하루 쉬고, 심지어 그날도 일한다면 50%의 특근 수당을 받는 날입니까?(특히 언론에서 이 부분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어떤 날이 기념되고 있는 것에는 보통 그 유래가 있고, 역사가 있습니다. 왜 노동절의 역사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있었던 기념비적인 총파업을 기념하고, 단순히 기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투쟁을 펼쳐나가는 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저는 초과수당을 받게 되겠죠. 노동절이면 거리에서 부르던 구호들과 민중가요들을 조용히 입속으로 읊어보면서... 그러나 노동절에, 노동의 현장 곳곳에서, 당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께 지지의 마음을 보내며, 컴퓨터로 글이나 끄적이고 있는 제 자신을 안타까워 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Posted by 마산야수

歌王

 저희 부모님께서는 생전 무슨 공연을 찾아다니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한 번, 당시 초등학생이던 저와 제 남동생에게는 어디 좀 다녀올 곳이 있다고 속이고 어느 가수의 디너쇼를 다녀오셨다가 그 티켓이 걸려서 저희의 엄청난 비난을 들으셨죠. 우리만 놔두고 좋은 구경 다니신다며 징징거리는 저희에게도 엄청 흐뭇하게, '사실 정말 좋았다'고 털어놓으실 정도로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 가수는 조용필이었습니다.


 20대의 나이에는 안 어울리게 김광석과 김현식의 노래를 매우 좋아하고 노래방에서도 즐겨부르는 마산야수는 조용필 또한 좋아합니다. '단발머리'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물론이고 사실 롯데의 응원가로도 쓰이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격하게 아낍니다. (이것은 리버풀팬으로서 You Will Never Walk Alone'을 부르면서 느끼는 전율과 같은 것일지도...^^)

 그래서 당연히 어제 '가왕' 조용필의 (무려!!!)19집 앨범 [Hello]의 음원들이 모두 발표되자마자 모두 들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선 공개된 'Bounce'만 듣고도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하며 다른 음원들이 발표되기를 기다렸는데, 감상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도전

 우선 이번 앨범에 대하여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종 방송에 나와서 예전 히트곡 몇 소절 부르고, 당시 스타들과의 추억 몇 마디 털어놓기만 해도, 그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독보적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60대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으로 가득한 정식 앨범을 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월드스타' 싸이Psy와 정면 승부를 벌여야 하고, 음악적으로는 전반적으로 락에 기반을 둔 모던한 느낌에 20대들이 좋아하는 감성 래퍼 버벌진트의 피쳐링까지 가미하기도 하고, 감성은 말랑말랑한 게 젊음이 가득합니다.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Bounce Bounce 두근대 들릴까 봐 겁나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밤새워 준비한 순애보 고백해도 될까

-'Bounce' 中

 

 정말 이 가사가 60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데도 어쩜 그리 덤덤하고 또 매력적일까요. "네 흔적을 타투처럼 새길게 Hello~♪ ('Hello' 中)"이라는 가사가 20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면 너무 느끼할 것 같지만 관록의 가왕은 소녀팬이었던 지금의 어머님들을 매료시키고, 젊은이들까지도 탄성 짓게 만듭니다. 혹자가 그러더군요. 정치에서 못 이루던 그 놈의 '통합'을 가왕이 세대통합으로 실현시켰다고.



너무 가볍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모두에게 도전으로 보이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돈이 급했냐', '아이돌들이 부럽더냐'는 악플도 드문드문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앨범이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의 추억을 아파하지 마라. 나는 왜 귀로를 맴돌고 있나('어느 날 귀로에서' 中)"처럼, 연륜이 묻어나는 가사들에서 회한을 털어놓기도 하고, "거친 광야를 가로질러 눈 덮인 산을 넘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 ... 인생의 길을 열어 살아갈 용기 갖으리('그리운 것은' 中)"라고 노래하며 젊은 날 소녀들을 환상으로 이끌던 여전히 '젊은 오빠'의 모습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위대합니다. 음원 저작권 개념이 부족하던 시절, 사기에 가까운 계약 조건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는 과거도 그에게는 영광의 세월 속, 아쉽지만 조그마한 기억의 조각일 뿐입니다. 수십년 동안 한국 가요계의 최정상을 지키면서도 항상 여유가 묻어나는 그가 진정한 가왕입니다.



배우라면 안성기, 가수라면 조용필처럼

 왠지 모르게 이번 앨범 전곡을 듣고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성기와 조용필이 많이 닮아있다고.

 두 분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수십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키면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팬들과 함께 늙어갑니다. 그러나 절대 '곱게' 늙지 않습니다. 파격적인 변신들을 하죠. 안성기가 죽은 친구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50대 남성으로 분했던 '페어러브(2009)'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마 조용필의 이번 앨범도 그럴 것입니다.

 단순히 조용필의 새로운 도전으로만 오래 기억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한때 너무나도 사랑받았던, 지금은 왜곡된 대한민국의 음악 시장에서 잠시 소외된 그들이 '아직 나 죽지 않았다며, 실력으로 승부해보자'고 다시 한 번 소리쳐올 날을 기다립니다.

Posted by 마산야수

 80년대 영국의 보수당 정권의 수장으로서 영국 총리를 지낸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가 영국 현지 시각으로 4월 8일 뇌졸증으로 별세했습니다. 이미 10여 년 전 처음 뇌졸증이 발생했고, 이후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근래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행사인 2011년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등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에는 방광 수술을 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중류층의 독실한 감리교도 집안의 딸, 보수정치인을 꿈꾸다

 그녀는 최상류층 가장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랜덤이라는 작은 도시의 시의원과 시장을 역임했으나 식료품 가게 점원부터 시작해 정치에 투신해 자수성가한 인물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정치를 가까이하며 자란 대처는 옥스포드 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당시 영국 대학가에서 압도적이었던 진보파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최상류층 집안에서 자란 이들이 민중과 혁명을 논하는 것에서 부조리를 본 것입니다.

 이후 그녀는 비교적 마이너했던 옥스포드 보수연합에 들어갔고, 이후 런던의 핀츨리 선거구에서 의원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1965년 보수당의 히스 내각이 들어서자 그녀는 각종 장관 자리를 역임하며 역량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1974년 히스 내각이 붕괴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여 당권에 도전했고 보수당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됩니다.



'철의 여인'으로 군림하다

 이후 경기불안으로 높은 세율과 인플레이션, 호전적인 노조에 대한 반발이 극도로 달했던, 이른바 '불만의 겨울' 직후 총선에서 승리하며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의 노선은 매우 뚜렷했습니다.

 TINA(There Is No Alternative), 신자유주의가 곧 진리라 주장했던 그녀의 통치 아래에서 '노조의 천국'이라 불렸던 영국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사업장의 모든 노동자는 노조원이어야만 하던 클로즈드 숍(Closes-shop)을 폐기하고 복수노조를 인정함으로써 노조의 권력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탄광 노조와의 힘겨루기에서 그녀의 강철 같은 면모는 더욱 잘 드러납니다. 20곳에 이르는 국영 탄광을 폐쇄하고 2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겠다는 계획에 대대적인 파업이 있었지만 대처는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으며 오히려 노조 내분을 유도하고, 국가가 미리 확보해둔 석탄 재고를 풀어 국민들은 안정시키며 승리합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영국의 세력을 넓히는 흐름을 보였습니다. 유럽 최초로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 배치를 허용하고, 카다피 통치하의 리비아를 타격하려는 미 공군 폭격기에게 영국 공군 기지 사용 또한 허가했습니다. 동시에 아르헨티나와의 영토 분쟁을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로 마무리지었습니다. 이러한 강경일변도의 정책들은 가시적인 효과를 유도했고, 그녀는 아주 튼튼한 지지기반을 갖추게 됩니다.



'사회'는 없고, 고통받는 '개인'들만이 남다


브래스트 오프 (1997)

Brassed Off 
9.3
감독
마크 허먼
출연
타라 피츠제랄드, 이완 맥그리거, 피트 포스틀스웨이트, 스티븐 톰킨슨, 짐 카터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코미디 | 영국, 미국 | 105 분 | 199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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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녀의 독단적인 정책들은 문제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아직도 마산야수는 대처하면 떠오르는 영화로 그녀의 삶을 직접 다룬 '철의 여인(The Iron Lady, 2011)'보다 폐쇄 예정의 작은 탄광촌의 밴드 이야기를 다룬 '브래스트 오프(Brassed Off, 1996)'를 꼽습니다. 한창 혈기는 왕성한데 좁은 학교에 구속되어 경쟁에 지쳐가던 고교 시절, 인간은 시장이라는 구조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성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영화로 기억합니다. 많은 서민들의 삶이 "누구나 자신의 몫을 해야"하며 "사회는 없고 오직 개인들이 존재할 뿐"이라는 대처리즘 아래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받기도 했습니다.



행동하는 '철의 신념'

 하지만 여전히 대처는 위대한 영국인이며, 역사는 그녀의 이름을 오래 기릴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며 정부의 권력약화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와, 이와는 반대로 개인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전통이나 종교 등 사회의 틀로써 개인을 제약하는 보수주의가 섞여 사상적으로 명확하지 못했음에도 대처리즘은 그 당시 어떠한 정치인의 반대도, 공격도 없이 영국을 통치해 나가는 기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녀는 영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현재의 모순을 타개하려던 행동가였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상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렛 대처의 행동하는 신념이 그녀를 '철의 여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다

 2013년 현재의 한국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한국판 '불만의 겨울'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불만은 극단적인 특정 주장에 대한 조용한 다수의 일방적인 반감이 아니라 깊은 이념의 골을 경계로, 다수 대 다수가 반목하고 있는 현상이기에 영국의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국민의 절반은 강남의 고층 아파트와 높은 등록금,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못' 난다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나머지 절반은 분단현실에도 불구하고 무책임하게 제시되는 민족의식, 빈부격차를 줄이자는 선동적 공약들에 반대합니다. 이 위태로운 계절을 종식시키는 것은 대처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의, 또는 부친의 카리스마의 후광을 입은 정치인일까요?

 '노조의 천국'은커녕 언제나 목숨걸고 싸워야만 목숨을 부지하는 현실을 견뎌왔는데,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높은 크레인 위에서 허공을 향해 외쳐야만 하고, 온몸을 다쳐가면서도 죽은 동료의 분향소를 지키지 못해 눈물 흘리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바라보며, 마가렛 대처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마산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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