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0시 0분, 현지 시각으로는 19일 오후 3시, 12-13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EPL)의 최종전 10경기가 일제히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중에서 생중계된 경기는 Anfield에서 펼쳐진 리버풀과 QPR과의 경기였습니다. 이미 각각 7위와 강등이 확정되어 유로파리그 진출이나 잔류와 같은 인센티브도 없는 경기. 물론 이 경기가 생중계된 이유는 단 한 가지, 박지성 선수의 선발 출장 때문이었습니다. 세자르, 레미 등과 더불어 이번 시즌이 끝나고 이적할 것으로 예상되는 박지성 선수입니다. 물론 그 팀은 EPL의 어느 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오늘 경기는 박지성 선수의 마지막 EPL 경기가 될지도 모르죠. 차범근 이후 한국이 낳은 가장 세계적인 스타이자, 국가대표팀의 영웅, 많은 선수들의 우상인 박지성 선수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경기, 그러나 저에게 이 경기는 또 한 명의 우상을 떠나보내는 경기였습니다.
우리는 11명의 캐러거로 이루어진 팀을 꿈꾼다네!
지금은 광적인 야구팬이지만,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저는 해외축구에 미쳐 있었습니다. 다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자 맨유팬이랍시고 EPL을 본다며 깔보던 저는 리버풀의 팬이었습니다. 아주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박지성이 영국으로 향하기 직전에 펼쳐진 04-05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스탄불의 기적이라는 명칭이 더욱 익숙한) 경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의 저에게 더욱 멋지게 보였던 선수는 그라운드를 누비는 제라드, 알론소, 스미체르였습니다. 그렇게 리버풀 팬이 된 저는 친구들과 이룬 축구팀에서도 리버풀 유니폼을 제안했고, 중앙수비수였고 체격 조건도 비슷했던 저는 자연스럽게 등번호 23번와 그의 이름을 유니폼에 새겼습니다.
제임스 리 던컨 캐러거. 제이미 캐러거라는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이 헌신적인 수비수는 1978년 리버풀에서 태어났습니다. 1990년 유스팀에 입단한 이래 오직 리버풀을 위해서만 뛰었던 그가 어린 시절 지역 라이벌로 '머지사이드 더비'의 또 다른 주인공인 에버턴의 팬이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리버풀에 입단한 후, 그가 단 한 순간도 팀을 위해 헌신적이지 않은 순간은 없었습니다. 캐러거의 응원가에는 "우리는 캐러거들로 이루어진 팀을 꿈꾼다네(We all dream of a team of Carraghers.)"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가장 열정적인 그들의 부주장을 향한 콥(리버풀 서포터즈)의 애정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새벽의 은퇴 경기까지 총 737경기를 치르며 그가 만든 에피소드도 매우 많습니다.
리버풀보다 더 큰 클럽이 뭔데?
이미 2001년 트레블의 위업을 이루었고, 그 후 침체기를 맞고 있는 팀에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던 젊고 강인한 수비수였던 그에게 당연히 이적설이 있었습니다. 특히 04-05 챔피언스리그에서 활약하며 더욱 주목을 받자 한 기자가 리버풀보다 '더 큰' 클럽으로 이적해 더 많은 메달을 딸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캐러거는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리버풀보다 더 큰 클럽이 뭔데?" 어쩌면 '더 큰'이라는 수식어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캐러거에게 클럽이란 리버풀 뿐이니까요.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결국 우승을 차지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이스탄불의 기적'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물론 제라드, 알론소, 스미체르처럼 위협적인 찬스를 만들어 내고 골을 넣은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 날의 경기를 돌려보면 한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습니다. 이미 3장의 교체카드는 소진한 상태에서 쥐가 난 다리.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도 되어 있었다는 듯이, 절뚝거리며 공을 향해 달려듭니다. 그리고 이미 기적이라고 불려도 좋은 연장승부 끝에 찾아온 승부차기에서 그는 골키퍼인 두덱에게 '브루스처럼 해봐'라고 말합니다. 1984년 결승전에서 AS 로마 선수들을 당황시킨 리버풀의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의 춤추는 듯한 다리 움직임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세브첸코의 킥을 두덱이 막아내며 '춤덱'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해피 엔딩이었습니다.
삼사자보다도 라이버버드
리버풀은 매우 독특한 동네입니다. 그들은 스카우즈라고 불리는 강한 사투리를 사용하며 English(영국인)보단 Scouser(리버풀 사람)으로 불리길 원합니다.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온 캐러거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경기 중 큰 실수를 범한다면 리버풀 유니폼을 입은 순간보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순간이길 바란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는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삼사자기보다 라이버버드(Liverbird, 리버풀을 상징하는 상상의 새)가 새겨진 리버풀 문장이 더욱 소중하니까요.
그의 이런 열정은 단순히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2011년 4월 17일에 펼쳐진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그는 상대 선수와 충돌 과정에서 정수리를 강타당해 경기장에서 기절해버렸습니다. 10분이 지나서야 깨어난 그는 다시 경기장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팀 닥터의 끈질긴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결국 노심초사하며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그는 종료 휘슬이 울리며 팀의 1점 차 짜릿한 승리가 확정되자마자 팀 동료들을 축하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라운드에 쓰러져도,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팀의 승리를 위한 열정만이 가득합니다.
물론 그의 이런 열정이 약간 과해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팀 동료인 아르벨로아가 마크맨을 완전히 놓치며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자 불 같이 화가 난 캐러거는 알론소가 말리기 전까지 그라운드 위에서 아르벨로아와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고 유서 깊은 더비 경기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레즈 더비'에서 그는 더욱 과격해집니다. 나니를 걷어차고 퇴장당해 부상을 입힐 우려가 너무 컸다며 비난을 받는 동시에 팀의 패배를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헌신이라는 단어도 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사실 캐러거는 체격 조건이나 신체 능력이 매우 뛰어난 선수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는 리버풀 역사상 가장 많은 자책골(5골)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이기도 합니다. 그가 737경기에서 상대팀의 골문으로 넣은 득점 수와 정확하게 일치하죠. (오늘 경기에서 61분에 때린 오른발 중거리슛이 골대를 맞지 않고 골문 안으로 향했다면 오래간만에 골을 기록할 수도 있었겠지만)그리고 심지어 그 자책골 중 2개는 1999년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레즈 더비' 한 경기 동안 기록한 것입니다.
올해 2월 22일 안필드에서 제니트를 상대로 했던 유로파리그 32강 토너먼트 2차전, 이미 1차전에서 2:0으로 패했던 갈 길 바쁜 리버풀은 캐러거의 치명적인 실수로 헐크에게 오히려 선제골을 헌납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리버풀은 세 골이나 넣으며 희망을 이어갔지만 결국 캐러거의 실수로 잃은 그 한 골이 원정골 우선원칙에 따라 리버풀의 패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경기를 보며 이제는 우리의 영원한 부주장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었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은퇴경기를 1경기 앞둔 지난주, 팬들의 플래카드에 감동해 직접 구단버스 밖으로 나와 함께 포즈를 취한 캐라
그럼에도 콥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헌신이라는 단어도 그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레전드라는 단어는 너무 많이 쓰여 그와 같이 진정으로 특별한 선수를 기억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떤 선수가 감히 그만으로 이루어진 팀을 꿈꾼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경기는 전반에 쿠티뉴의 멋진 중거리슛으로 획득한 리드를 잘 지킨 리버풀이 1:0으로 승리했습니다. 선수들이 캐러거에게 많은 공격 찬스를 몰아주는 것이 확연히 보였습니다. 골대를 맞춘 중거리슛이 아쉽긴 했지만 팬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골을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첼시의 존 테리, 맨유의 리오 퍼디난드처럼 대단한 피지컬이나 종종 득점을 기록할 수 있는 공격본능이 없어도, 그는 가장 충직하고 열정적인 리버풀 선수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는 이제 안필드를 떠나 해설가로서 제 2의 축구 인생을 시작합니다. (사투리가 매우 심한 그가 잘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콥은 굳게 믿습니다. 그램 수니스가 그랬듯, '킹 케니'가 그랬듯, 언젠가 우리의 캐라가 안필드로 돌아올 것이라고요.
제이미,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The Kop will miss you a lot! Thank you, Ca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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